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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좋은글/고승들의철학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 오도송(悟道頌)

by 헤라윤 2024. 11. 3.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

곡차를 좋아했던, 진묵대사 (震默大師)

 

진묵(震默1562∼1633) 대사가 하루는 길을 가다가

강변에서 천렵놀이를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그때 그들은 방금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이고 있었다.

대사가 펄펄 끓는 솥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생기발랄하게 헤엄쳐 다니던 물고기들이

아무 죄 없이 가마솥에서 삶겨져 죽는 괴로움을 당하는구나."

그 말을 듣고 한 젊은이가 대사에게 시비조로 농담을 걸었다.

"시님(스님), 시님도 이 괴기국 맛 좀 보실랑가라우?"

대사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야 고기국도 주면 잘 먹지."

"그럼 한 번 자셔보시더라구요. 몽땅 드릴랑게요"

그러자 대사는 그릇에 떠서 담고 어쩌고 할 것도 없이

뜨거운 솥을 번쩍 들더니 그대로 입에다 대고

한꺼번에 죄다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젊은이들이 기겁하도록 놀랐다.

 

잠시 뒤에 한 청년이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물었다.

"오메, 징한 것! 부처님께서 살생을 금하셨는디

시님은 괴기국을 잘도 잡수시는구만이라!

그라고도 시님이라 할 수 있을까라우?"

 

대사가 그런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 고기들을 잡고 죽인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지만

나에게는 이 고기들을 살릴 재주가 있느니라."

그리고는 저만큼 하류 쪽으로 내려가더니

바지를 훌렁 벗은 뒤 강물에 엉덩이를 대놓고

태연히대변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이 다 있는가.

스님의 항문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대변이 아니라

방금 먹은 매운탕인데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물고기들이

냇물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리를 휘젓거니

비늘을 번쩍이거니 하며 언제 죽었었느냐는 듯이

생기 차게 헤엄쳐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대사가 고기들이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고 하는 듯이 이렇게 일렀다.

 

"물고기들아, 이제부터는 멀리 큰물로 가서 노닐되

앞으로는 미끼를 탐내다가 다시는 가마솥에삶기는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므나."

그때서야 이 스님이 여간 법력이 높은 도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옛날의 득도한 고승들이 사소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민중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듯이 진묵 대사도 도통한 데다가

풍류를 즐길 줄 알았으며, 특히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술이라고하면 먹지 않았고

꼭 '곡차(穀茶)'라고 해야만 마셨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진묵 대사가 어느 날 산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향기로운 곡차 냄새가 풍겨왔다.

대사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술 아닌 곡차 냄새를 따라갔다.

그곳은 어느 조그만 암자였고,

그 암자의 중이 무슨 일에 쓰기 위해서였는지 술을 거르고 있었다.

대사가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하는고?" 그 중이 힐끔 돌아보더니 대꾸했다.

"보면 몰라라우? 술을 거르고 있당게요."

곡차라고 해야 한 잔 얻어 마시겠는데

술이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대사는 입맛만 쩍쩍 다시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잘 익은 곡차 냄새가 계속 따라오며

발길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다시 암자를 찾아가 또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거르고 있는고?"

그러자 그 젊은 중이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아, 술을 거른당께로! 늙은 중이 귀가 먹어부렀능가?

귀찮게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물어본당게요 잉?"

 

이 녀석은 구제불능이구나!

대사는 별 수 없이 곡차 한 잔의 희망도 미련도 버린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금강역사가 나타나더니, 철추로 그 중의 뒷머리를 내리쳤다고 전한다.

 

전주·완주·김제·부안 곳곳에는

지금도 진묵 대사에 얽힌 이 같은 수많은 전설이 살아 전한다.

서민 속의 고승-진묵 대사는 명종 17년(1562)에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 오늘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니 '소석가'라고 불리며

수많은 전설을 남긴 진묵 대사였지만

어머니가 조의부인(調意夫人)이라는 사실 외에는

속성과 속명이 무엇인지,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대사의 법명은 일옥(一玉)이요, 진묵은 당호라고 하는데,

어쩌면 일옥이 속명이고 진묵이 법명인데

잘못 알려진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니 조의부인만 해도 '조의'가 성인지 이름인지,

또는 다른 무엇을 뜻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진묵 대사의 행적을 전해주는 기록으로는

초의(草衣) 선사의『진묵조사유적고』등이 있다.

 

진묵 대사는 7세에 출가하여 봉서사에서 사미승이 되었다.

봉서사는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산 2번지 서방산 남쪽 기슭에 있다.

봉서사는 신라 성덕왕 25년(726)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나옹(懶翁) 화상이 중건했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건물들이 완전히 소실,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서남수 스님이 1963년 10월부터 재건을 시작하여

이듬해 10월에 요사채를 세우고, 1975년 10월에는 삼성각을,

1979년 3월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진묵전을 완공해 오늘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재 봉서사(성모암)에는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된

진묵 조사 부도와, 1982년 10월에 건립한 진묵 대사 유적비가 있고,

진묵당에는 진묵 대사와 그의 어머니 조의부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경내를 소개해주며 서남수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신기했다.

해마다 음력 10월 28일은 대사의 입적일인데

이 날 대사의 부도 앞에 곡차(술)를 올리면

어느새 잔 속의 술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6·25전란 통에 깨어지고 흩어진 것을 조각조각 찾아

본 모습대로 복원한 부도가 해마다 몇 ㎝씩 '살이 찐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들었다.

 

일곱 살 때 봉서사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된 진묵은

나이는 어리지만 워낙 천성이 영민한지라

스승이 없이도 여러 가지 불경을 읽고 스스로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한 번은 절에서 불사가 있었는데

주지 스님이 진묵 대사가 나이는 어리지만

행실이 바르고 깨끗하다고 하여 옹호단(擁護壇)에 향 피우는 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에 주지의 꿈에 한 신장(神將)이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짖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부처님을 지키는 천신이거늘

오히려 부처님의 예를 받다니, 이처럼 송구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주지는 급히 향 피우는 소임을 바꾸어 우리로 하여금

감히 부처님의 예를받지 않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편히 지내게 할지어다!"

깜짝 놀라 깨어난 주지가 이내 진묵을 불러 향 피우는 소임을

다른 사미에게 맡기도록 하였는데생각할수록 신기하였다.

그렇다면 저 보잘것없는 소사미 녀석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주지는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 일화는 바로 초의 선사의 『진묵조사유적고』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요, 두 번째 이야기는다음과 같다.

 

대사가 아직도 봉서사의 사미승으로 있을 때에

한 번은 창원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이때 어느마을의 어린 처녀가

스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으나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으므로 끝내 죽고말았다.

그 처녀는 뒤에 사내아이로 환생하여, 이름을 기춘(奇春)이라 하였으며,

대원사(大元寺)의 시동이 되어 마침내 진묵 대사를 모시게 되었다.

대사는 그를 매우 귀여워하고 아꼈다.

다른 중들이 이를 시기하기에

하루는 대사가 국수를 삶게 한 뒤에 중들에게

모두 바리때를 내놓게 했다. 그리고 시자를 시켜

바리때마다 가운데에 바늘 하나씩을 꽂게 하였다.

"자 다들 먹자꾸나." 하고 대사는 바리때를 들었는데

그 속에는 국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대사는 맛있게 국수를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중들의 바리때에는

바늘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고 한다.

 

웬만한 계율은 뛰어넘어 서민 속에서 애환을 함께 하며

그들을 깨우침의 길로 인도한 것이 진묵대사의 독특한 포교방식이었으니

이는 원효성사의 민중불교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승려들 가운데는 그의 파격적인 면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배척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진묵 대사는 대원사를 비롯하여

부설 거사가 신라 때에 창건한 월명암도 재건하고

오래 주석했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월명암에 있을 적에 하루는 중들이 모두 탁발을 나가서

대사가 시자만 데리고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자마저 제사를 지내러 마을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시자가 공양 준비를 모두 해놓고 "때가 되면 찾아 드십시오" 하고 암자를 떠났다.

그때 대사는 방장 안에서 문을 열고 『능엄경』을 읽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시자가 돌아와 보니 음식은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있었고

대사도 어제 떠날 때 그 모습대로 앉아서 경문을 읽고 있는데 바람에

문짝이 닫혀 손가락이 상해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능엄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시자가 문안을 여쭙자 대사가 말하기를

"너는 제사도 지내지 않고 그냥 돌아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묵 대사는 대원사·월명암·원등암 등에서 수행하다가

만년에는 봉서사로 돌아와 입적할 때까지 지냈다.

하루는 대사가 물을 찾아서 시자가 미지근한 쌀뜨물을 가져다 드리니

그것을 받아 두어 모금 입에 머금더니 동쪽을 향해 내뿜는 것이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나서 귀중한 팔만대장경을 포함하여

절이 온통 타버릴 지경에 처했는데, 갑자기 서쪽으로부터

한바탕 소나기가쏟아져 그 불을 껐다고 하는 바,

그 소나기가 내릴 때가 바로 대사가 물을 뿜을 때였다고 한다.

 

 

또 그는 어머니 조의부인이 늙어 거동을 못하자

자신이 머무는 암자 부근 마을에 모셔두고

극진히 봉양하다가 돌아가시자 제문을 지어 지극한 추모의 정을 다했으니,

한 번 출가를 하면 집도부모도 돌보지 않았던 다른 스님들과는

확실히 달랐던 인간적인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세월은 흘러 진묵 대사도 이승살이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하루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짚고 절 밖으로 나가

개울가를 거닐다가 주장자를 세운 채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했다. "잘 보거라. 저것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그림자이니라."

그러자 말뜻을 못 알아들은 시자가

"아니지라우, 저건 시님의 그림자가 아니랑가요?" 했다.

대사가 일렀다.

"무식한 녀석! 너는 다만 화상의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모니불의 참모습은 알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절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결가부좌한 채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이제 가겠으니,

너희들은 물을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물어보아라."

제자들이 묻기를 "대사님께서 입적하시면 백년 뒤에는

종승(宗乘 : 법맥)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했다.

대사가 한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종승은 무슨 종승이 있겠느냐."

그래도 제자들이 거듭 묻자, 마지못해 대답하기를

"명리승(名利僧)이지만, 그래도 정 노장(靜老長)에게 붙여 두어라." 했으니

정 노장은 곧 서산휴정(西山休靜) 대사를 가리킴이다.

 

어떤 기록에는 진묵 대사가 서산 대사의 법제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진묵 대사가 법통이니 법맥이니 하는 것을 따지는 중들은

대체로 명리를 추구하는 승려라고 비판한 것을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고 나서 대사는 조용히 입적하니

인조 11년(1633) 음력 10월 28일이었다.

서민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 했고 서민의 존경을 받으며

서민불교의 새날을 밝혀온 성자

-진묵 대사의 그때 법랍은 52년, 세수는 72세였다.

 

진묵(震黙: 1562-1633)

오도송(悟道頌)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

하늘을 이불로 땅은 잠자리 산을 베개로 삼고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달은 촛불로 구름은 병풍으로 바다는 술통이라네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곤드래만드래 취해 슬그머니 일어나 춤을추니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긴 소매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봐 염려뇌노라

 

*居然: 거리낌 없이. *却嫌: 도리어 걱정이 됨.

*崑崙: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다는 중국 전설 속에 나오는 산.

곤륜산은신화나전설에 등장하는 가장 높은 산으로 티베트와 신강성의 경계를 동서로 연결하는 카라코람 대산맥의 중국식표기 옥(玉)의산지이며 중국 상대에 불사약을 가진 신녀 서왕모(西王母)가 거주한다고 하여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받들었던 곳

출처-선바우

출처 입력

 

조사단 주련을 바라보며

진묵대사 어머니 묘지를 우러른다.

 

“나 죽기 전에 자식 하나만 낳아 달라.”

한 어머님의 말씀에

 

“만년 향화자리에 어머니 묘지를 써 다달이 추모의 재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해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연 스님 가신 지 3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떤 열사의 묘지보다도 더 아담하고 깨끗하게 가꾸어진 진묵대사 어머니 묘지는 천만대중이 우러르는 성지로 변해가고 있다.

 

스님의 이름은 일옥이고 호는 진묵이며 만경 불거촌 사람이다. 어머니는 조의씨인데 대사가 태어났을 때 주위의 풀 나무들이 3년 동안 마르고 시들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이에 큰 사람이 날 징조다.” 하였다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성이 지혜롭고 사랑스러워 불거촌에 생불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7세에 전주 서방산 봉서사에 들어가 내전을 익혔는데 속속들이 그 내용을 알고 이해하고 눈으로 보기만 하면 외워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 대중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작은 사미로만 보았다. 주지 스님께서 부전일을 맡겨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과 신중님께 향 사르고 예배하자 오래지 않아 주지스님 꿈에 “저희들 작은 신들이 큰스님 부처님께 예배를 받으니 죄송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부터는 큰스님께서 예배하시지 말라 하여 주십시오” 하여 대중들이 입을 모아 “부처님께서 거듭 태어나셨다”고 하였다.

 

봉서사 5리 밖에 봉곡선생님 집이 있었는데 봉곡선생은 사계(沙溪)선생의 높은 제자였다. 서로 왕래하면서 방외(方外)의 도리를 주고받으니 괴이한 사람들이라 하였다. 하루는 선생님 집에서 강목(綱目) 한 부질을 빌려 일꾼에게 짊어지게 하고 절로 돌아오는데 오면서 책을 한 권씩 한 권씩 빼어 보고, 보고 나서는 길거리에다 책을 버렸다. 절에까지 오고 나니 한 권도 남지 않는지라 일꾼이 물었다.

 

“어찌하여 남의 책을 길거리에 함부로 버리십니까?”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은 버려야 되지 않겠느냐.”

 

할말이 없었다. 일꾼이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흩어진 책들을 주어가지고 와서 봉곡선생에게 말씀드리자 봉곡선생님은 후일 스님을 모셔 그 책 내용을 물었다.

 

“무엇은 무엇이고 무엇은 무엇인데 스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니 스님께서는 글자 한자도 틀리지 않게 그 모든 강목을 다 외우고 있었다. 이에 놀라 소문을 퍼뜨리니 스님의 도력이 널리 사해에 퍼지게 되었다.

 

하루는 봉곡선생이 여자 노비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마련하여 보냈다. 그런데 길거리서 스님을 만나니 스님께서 허공을 바라보고 섰다가 말했다.

 

“너 아기 가지고 싶으냐?” 노비가 대답이 없자

“박복한 중생 할 수 없구나.” 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헛되이 샐까봐 멀리 허공 밖으로 물리쳤다. 두 분이 이렇게 서로 만나 말없는 가운데 정을 통하였다.

 

 

스님께서 일출암에 계실 때 어머니를 왜막촌에 모시고 있었는데 모기 때문에 고생을 하자 스님께서 산신령을 불러 야단을 쳤다.

 

“너는 부모도 없느냐. 우리 어머니를 왜 이리 괴롭히느냐?”

 

이에 놀란 산신령이 모든 모기를 다른 곳으로 몰아내어 지금까지도 왜막촌에는 모기가 없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만경 북쪽 유앙산에 장사지내고

 

“누구고 이곳을 청소하고 절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풍농(?農)의 이익을 얻으리라.” 하여 원근촌 사람들이 다투어 음식을 올리고 묘역을 보살펴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향화가 그치지 않고 있다.

 

매일 저녁 동쪽으로부터 밝은 별빛이 비쳐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청량산 목부암의 장명등이었다. 스님께서 드디어 그곳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그곳에는 16나한이 있어 항상 스님을 시봉하였다. 불빛이 멀리 월명암까지 비친 것은 아마 나한님들이 큰스님에게 자신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일 것이다.

 

전주에 은둔하여 사는 한 아전이 있었다. 그는 평소 대사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관청의 물품들을 사사롭게 소비하고 장차 도망가고자 대사에게 와서 물었다. 대사가 말했다.

 

“관물을 축내고 도망간다면 어떻게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겠느냐"

집에 돌아가 두어말 공양미를 가지고 와서 이곳 나한님께 기도를 드리면 좋은 방법이 나올 것이다.”

 

아전이 돌아가 쌀을 준비해 가지고 왔다. 스님께서 시자를 시켜 공양을 지어 나한님께 올리도록 하고 아전에게 물었다.

 

“부중(府中)에 혹 빈자리가 있는가?”

“예. 형리(刑吏)가 있기는 합니다만 월급이 박하고 무료한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자청하여 맡되 30일을 넘기지 말라.”

 

아전이 돌아가자 대사는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으로 들어가 차례대로 나한님 머리를 두들기면서 “아전의 일을 도와주라” 부탁하였다.

 

이튿날 밤 나한들이 아전의 꿈에 나타나 꾸짖었다.

 

“그대가 원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말할 일이지 어찌하여 큰스님께 말씀드려 우리들을 괴롭히느냐. 너로 보아서는 돌볼 수 없지만 스승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도와준다.”

 

아전은 이 꿈을 꾸고 자청하여 형리가 되었다. 30일 동안 축낸 관물을 보충해놓고 다른 아전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다른 아전은 뇌물죄로 그만 구금되고 말았다.

 

하루는 스님께서 홀로 길을 걸어가다가 한 사미를 만나 낙수천 가에 이르렀다.

 

“네가 먼저 건너가 물이 깊고 얕은 것을 알아보라.”

 

하니 사미가 가볍게 건너가자 스님께서는 안심하고 몸을 물에 넣었다가 깊이 빠지게 되자 사미가 붙잡아 건져주었다. 그때서야 나한들이 장난한 것을 알고 한 게송을 읊었다.

 

그대 영축산의 미련한 나한들아

마음속의 잿밥 언제나 쉬려느냐.

신통 묘용은 비록 따르기 어려우나

대도는 마땅히 나에게 물으리라.

 

 

하루는 스님께서 봉서사에 계실 때 시자를 불러 명령하였다.

“소금을 가지고 부곡으로 가거라.”

“가서 누구에게 줄까요.”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재를 넘어 골짜기를 내려가니 사냥꾼들이 방금 노루를 잡아 회를 쳐 가지고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오자 “이는 필시 옥노(玉老;진묵대사)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보내주신 것이다” 하고 감사하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물을 찾아서 미지근한 쌀뜨물을 갖다 드리니 그것을 받아 입에 머금었다가 동쪽을 향해 내뿜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나서 다 탈 뻔하였는데 갑자기 뿌연 뜨물비가 내려 불을 꺼주었다. 알고 보니 그 시간이 바로 노스님께서 뜨물을 입에 머금었다 내뿜은 시간이었다.

 

한번은 스님께서 봉서사 뒤 상운암에 계실 때 탁발승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멀리 나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스님의 얼굴에 거미줄이 처져있고 무릎사이에 까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먼지를 쓸어내고 거미줄을 거두어 낸 뒤

 

“스님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하니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하고 물었다.

 

또 스님께서 대원사에 계실 때 밥 때가 되면 밀기울만 물에 타서 잡수셨다. 대중들은 그것이 싫어서 박대하여 공양도 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러운 것으로 밀기울을 더럽혔다. 그런데 그때 한 스님이 허공 가운데서 밥 발우를 가지고 내려와 스님께 드리니 스님께서는

 

“밥을 받는 것은 좋으나 멀리서 이렇게 까지 수고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밥을 가지고 온 스님이 말했다.

 

“저는 해남 대둔사 스님입니다. 밥 때가 되어 막 발우에 밥을 퍼놓았는데 갑자기 발우가 공중으로 떠 붙잡으니 제 몸까지 따라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아침저녁으로 스님께 공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 좋을대로 하게.”

 

이렇게 하여 장장 4년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발우가 왔다 갔다 하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7대에 걸쳐 액운을 만날 것이다.”

 

과연 대원사는 그렇게 좋은 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천계 임술년(1622) 완주(전주) 송광사와 홍산(충성) 무량사에서 똑같이 불상을 모시고 같은 시간에 점안식을 하고자 증사로 스님을 청하였다. 어느 쪽만 갈 수 없으므로 스님께서는 각각 증물(證物)을 주어 단위에 올려놓고 작용을 관하라 하고 당부하였다.

 

“무량사의 화주는 불상이 점안되기 전에는 절대로 절 문밖에 나가지 말라.”

 

그래서 송광사에서는 주장자를 증사단에 세워놓았는데 밤낮없이 꼿꼿이 서서 넘어지지 않았으며, 무량사에서는 염주를 증사석에 놓아두었는데 염주가 계속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무량사에서 홍성에 사는 어떤 사람이 불상 조성금을 단독으로 내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받고자 화주가 일주문 밖에까지 나갔다가 갑옷을 입은 신장님께 매를 맞아 죽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목욕하고 머리 깎고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끌고 개울가에 나가 물가에 주장자를 세우고 손으로 물 속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했다.

 

“저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너는 단지 스승만 알았지 진짜 석가는 모르는구나.”

 

 

[글] 활안 스님 저

[네이버 지식백과] 진묵스님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